카시오의 ‘지샥(G-Shock)’은 1990년대 젊은 세대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전자시계다. 3040세대라면 누구나 어린 시절 한 번쯤 손목에 지샥을 채워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행의 변화, 스마트기기의 시대가 도래하며 카시오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지샥의 인기 하락은 카시오의 긴 슬럼프로 이어졌고, 결국 ‘잃어버린 10년’을 만들었다. 이후 카시오는 디지털카메라 등 다른 전자기기로 눈을 돌렸지만 번번이 실패를 맛봤다. 그러던 카시오가 최근 다시 부활했다. 그것도 ‘지샥’으로 말이다.

기본에 충실한 ‘지샥’, 카시오를 전 세계에 알리다
지샥은 카시오의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이베 키쿠오에 의해 개발됐다. 그가 지샥을 개발하게 된 계기는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날 출근하던 그는 아버지가 선물해 주신 시계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 순간 시계는 산산조각이 났다. 이를 본 이베는 충격에 강한 시계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베가 구상한 지샥의 제원은 배터리 수명 10년, 10기압 방수기능, 10m 높이에서 떨어져도 파손되지 않기 등 세 가지 조건이었다고 한다.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조건을 내걸고 이베는 1981년에 연구에 돌입했다. 2년간의 긴 연구를 마친 그는 1983년에 첫 지샥을 출시했다. 이베의 노력을 담은 첫 번째 지샥인 ‘DW-5000C’ 모델은 출시 초기에는 낮은 인지도 탓에 소비자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1984년 미국에서 방송된 한 광고가 지샥을 혁신으로 이끈 것이다. 당시 광고에서는 지샥을 아이스하키의 ‘퍽’ 대신 하키채로 때려 슛팅하는 연출을 했는데, 시계가 부서지지 않자 이를 두고 과장 광고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결국 지샥은 TV 프로그램을 통해 이를 검증했고, 트럭이 밟고 지나갔음에도 멀쩡하게 동작하는 모습이 공개되며 입소문을 탔다. 이후 지샥은 전 세계 시계 마니아들의 인기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승승장구 카시오, 시대의 변화에 위기를 맞다
단 한 번의 광고를 통해 전 세계에 지샥을 알린 카시오는 승승장구하게 된다. 1985년 진흙 방지 구조를 가진 DW-5500C 모델을 출시하면서 진흙에서 엄청난 내구성을 자랑했으며, 이 시계는 ‘머드맨(Mudman)’이라는 애칭이 붙을 정도로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어 1989년에는 시곗바늘로 움직이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결합된 ‘AW-500’을 선보이며 기술력을 한 단계 끌어올렸고, 1993년에는 ISO 6425 인증을 받은 다이버 시계로 세상을 다시금 놀라게 했다.
1994년 개봉한 영화 스피드에서 키아누 리브스가 다양한 액션 장면에서 지샥을 착용해 화제가 됐다. 이는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지샥의 열풍이 불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고, 이 인기는 2000년대까지 이어졌다. ‘지샥=카시오’라는 아이덴티티가 정립될 정도로 지샥은 카시오 그 자체였다.
우상향 길만 걷던 지샥. 그러나 그 영광에도 끝이 있었다. 스마트기기 등의 출현으로 하락세를 그려 나간 것. 다행인 점은 2000년대 초반 당시 카시오가 지샥을 비롯한 시계 사업 외에도 디지털카메라 등 전자기기 시장에서 강자의 입지를 굳히고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판도가 뒤바뀌었다. 2007년 애플이 아이폰을 출시하면서 디지털카메라 시장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카시오는 디지털카메라 시장에서 적자를 면치 못했고, 인기를 끌던 지샥 역시 ‘구시대의 전유물’ 취급받으며 매출이 반토막 났다.

위기의 카시오, 다시 지샥으로
위기의 늪에 빠진 카시오는 10년이라는 긴 침체의 터널을 벗어나지 못했다. 전자기기 시장에서 카시오의 명성은 이미 옛말이었고, 다른 시장에는 이미 독보적인 존재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랜 고민을 이어온 카시오는 큰 결단을 내렸다. 과거 카시오를 영광으로 이끈 지샥에 다시 주목한 것이다. ‘지샥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베는 튼튼하던 지샥을 더욱 튼튼하고 내구성 있게 제작했고, 여기에 ‘럭셔리’라는 이미지까지 더했다. 또한, 2010년대 중반 당시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아웃도어 열풍’이 불며 지샥의 인기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과거 강조하던 내구성을 더욱 부각, 중화권에서 ‘고릴라가 밟아도 멀쩡한 시계’로 광고하며 3040세대들의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어린 시절 차고 다니던 100달러짜리 지샥의 추억을 간직한 이들이 소비력을 갖춘 3040세대들로 성장했고, 그 결과 3,000달러가 넘는 고가의 지샥을 구매하며 향수에 응답했다. 이러한 폭발적인 반응으로 지샥은 당시 한정판으로 내놓은 고가의 모델도 품귀 현상을 빚었다. 나아가 2016년 총 판매량 850만 개를 기록하며 1997년의 기록한 최고 판매량을 19년 만에 새로 쓰는 데도 성공했다. 지샥은 2017년 누적 출하량 1억 개를 기록하며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카시오의 위기는 지샥의 인기 하락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카시오의 부활 역시 지샥을 통해 이뤄졌다. 앞으로 카시오가 지샥을 통해 어떤 스토리를 써 나갈지 지켜볼 일이다.